광장은 단순한 빈 공간이 아니다
도시의 중심에 자리한 광장은 단순한 ‘비어 있는 땅’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민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며, 축제와 예술이 펼쳐지는 사회적 무대입니다. 유럽 도시의 광장은 중세 시대부터 공동체의 중심이었고, 도시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장소로 발전해 왔습니다. 반면 한국의 광장은 근대화와 산업화를 거치며 행정 중심의 공간으로 변모하거나, 대규모 행사가 있을 때만 일시적으로 활성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글에서는 유럽과 한국의 광장을 비교하여, 공공 공간이 문화와 사회 구조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활용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는 단순히 건축적 차이뿐 아니라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도시의 운영 방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유럽 광장의 기원과 도시 속 역할
유럽의 광장은 고대 로마의 ‘포룸(Forum)’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포룸은 시장이자 회의장이며, 시민의 생활이 교차하는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치며 각 도시의 ‘심장부’로 발전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은 공화국 시절부터 종교, 정치, 상업이 공존하는 복합적 장소로 기능했습니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마요르 광장 역시 시장, 축제, 시민 집회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다층적 공간으로 발전했습니다.
이처럼 유럽 광장은 도시 계획의 핵심이었고, 건축물은 광장을 둘러싸며 공간의 경계를 형성했습니다. 광장 주변에는 시청사, 교회, 상점, 카페가 밀집해 있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졌습니다. 중요한 점은 ‘소유의 공간’이 아니라 ‘공유의 공간’이었다는 점입니다. 시민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머물 수 있으며, 토론하거나 휴식할 수 있는 열린 장소였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유럽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주말마다 플리마켓이나 거리 공연, 정치 집회가 열리며 광장이 ‘살아 있는 공공 공간’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광장, 근대화 이후의 변화된 의미
한국에서 광장은 전통적으로 도시 구조 속에서 뚜렷하게 자리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의 도시는 성곽 중심의 행정 공간이었고, 주요 공간은 왕권과 의례를 위한 장소(예: 경복궁 앞 육조거리)로 기능했습니다. 시민이 자율적으로 모이는 ‘광장’ 개념은 근대 이후 서구 도시 모델이 도입되며 생겨난 것입니다.
1960~1980년대 급속한 산업화 시기에는 도시 공간이 주거와 교통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광장은 종종 ‘기념비적 공간’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서울의 서울광장은 2004년 리모델링 전까지는 차량 교통 중심의 시청 앞 도로였으며, 행정 행사나 의식적 이벤트가 주로 열리던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며 시민참여와 문화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한국의 광장은 점차 ‘시민의 공간’으로 재정의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제도적 제약이 많습니다. 한국의 광장은 일정한 시간에만 개방되거나, 허가 없이 집회나 공연을 진행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주변 상권이 광장을 일상적 커뮤니티 공간으로 연결하지 못해, ‘특정 목적이 있을 때만 사용하는 공간’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한국의 광장은 여전히 ‘비워진 장소’로서의 성격이 강합니다.
공간 디자인과 사회적 활용의 차이
유럽 광장의 가장 큰 특징은 ‘머무는 공간’이라는 점입니다. 바닥 포장재, 벤치, 그늘, 분수, 카페테라스 등 사람들의 체류를 유도하는 설계가 기본 전제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주변 건축물은 인간 규모에 맞춰 배치되어 있어, 압도감보다 친밀감을 줍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시에나의 캄포 광장은 부채꼴 형태의 경사면을 활용하여 어디서든 중심부를 조망할 수 있게 하였고,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과 동선이 모이도록 디자인되었습니다.
반면 한국의 광장은 여전히 ‘행사 공간’ 중심의 평면적 구조가 많습니다. 광장 전체가 단일한 평지로 설계되어 있으며, 인근 건축물과의 관계가 약합니다. 예를 들어, 광화문광장은 2022년 재조성 이후 보행자 중심 공간으로 탈바꿈했지만, 여전히 주변 상업지역이나 주거지와의 연계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또한 기후적 요인도 다르게 작용합니다. 유럽의 광장은 온화한 기후에서 계절 축제가 활성화되었지만, 한국은 여름의 고온다습, 겨울의 한랭 기후로 인해 야외 체류 시간이 짧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모방하기보다, 기후·문화·생활 패턴에 맞는 공공공간 디자인이 필요합니다. 최근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지하철역 출입구, 공원, 복합 문화시설과 연계된 소규모 생활형 광장을 조성하며 ‘도심 속 일상 광장’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습니다.
공동체 의식과 참여 문화의 차이
광장을 움직이는 힘은 결국 사람입니다. 유럽에서는 시민 스스로가 광장을 ‘자신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행사나 집회를 자발적으로 조직합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파리의 리퍼블리크 광장은 정치적 시위뿐 아니라 인권, 예술, 환경 운동의 상징적 무대가 되었으며, 도시민의 의견이 실제로 사회 담론으로 이어지는 장소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에서는 공공 공간 이용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아직 충분히 자리 잡지 못했습니다. 관리 주체가 명확하고, 규제 중심의 운영이 많아 시민 참여가 제한됩니다. 이는 물리적 공간의 부족이 아니라 ‘이용 방식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광장이 시민의 토론과 교류의 장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행정기관 중심의 일방적 관리에서 벗어나 시민 주도형 프로그램이 확대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서울과 부산에서는 ‘도시재생형 광장 프로젝트’나 ‘시민참여형 플리마켓’이 늘고 있는데, 이는 유럽식 광장 문화를 한국적으로 재해석한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광장은 도시의 거울이다
유럽의 광장과 한국의 광장은 단순히 형태가 다른 것이 아니라, 사회가 공간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를 반영합니다. 유럽은 광장을 시민의 일상과 연결된 ‘생활공간’으로 유지해 온 반면, 한국은 아직 ‘기념 공간’이나 ‘행사장’의 성격이 강합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광화문광장, 청주 문화제조창 앞 광장, 수원 행궁광장처럼 시민이 주체가 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결국 광장은 도시의 민주주의와 문화 성숙도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앞으로의 도시 설계에서는 단순히 넓은 공간을 확보하는 것을 넘어, 사람들이 머물고 소통하며 자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살아 있는 공공 공간’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광장은 건축물보다 더 오래 남는 도시의 기억이며, 시민 공동체의 품격을 결정짓는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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