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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건축가 시리즈20. 건축가 이타미 준 – 자연과 감성의 건축을 남긴 사람

by kkhin5124 2025. 10. 25.

자연과 예술을 잇는 다리, 이타미 준

 

이타미 준(Itami Jun, 본명 유동룡, 1937~2011)은 일본에서 활동했지만 한국계 건축가로, 국적과 경계를 넘어선 감성적 건축으로 세계 건축계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단순히 건물을 짓는 기술자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교감하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예술가였습니다. 콘크리트와 돌, 물과 빛, 바람과 향기까지 공간 속에 끌어들이며 ‘감각의 건축’을 실현했습니다.

 

그의 건축은 화려함보다는 고요한 울림으로 기억됩니다. 제주도의 바람과 돌, 물의 이미지를 담은 작품들은 자연을 재료로 삼아 인간의 존재를 성찰하게 만듭니다. 이타미 준의 철학은 단순히 형태의 미학을 넘어, 공간을 통해 ‘삶의 태도’를 표현하는 데 있었습니다. 본 글에서는 그의 생애와 건축 철학, 주요 작품, 그리고 한국 현대건축에 남긴 영향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타미 준의 삶의 궤적 – 국경을 넘어선 건축가의 정체성

 

이타미 준은 1937년 일본 도쿄에서 재일한국인 2세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유동룡(兪東龍)이었으며, 일본 사회 속에서 한국인으로 살아야 했던 그는 항상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안고 살았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훗날 그의 건축 세계에 깊이 반영되었습니다.

 

그는 도쿄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1960~70년대 일본 건축계에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았지만, 점차 인간의 감정과 자연의 흐름을 반영하는 건축으로 전환했습니다. 그는 “건축은 인간이 자연과 대화하기 위한 언어”라고 말하며, 기계적 합리주의보다는 감성적 체험을 중요시했습니다.

 

1990년대 이후 그는 자신의 뿌리인 한국을 자주 방문하며 제주도를 중심으로 여러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일본에서 쌓은 설계 경험과 한국적 자연관이 결합한 그의 작품들은 한일 양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했습니다.

 

건축 철학 – 물, 돌, 빛(자연)이 만들어내는 감성의 구조

 

이타미 준의 건축은 단순히 형태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는 건축을 ‘감각의 예술’이라 정의했고, 인간의 다섯 감각이 공간 속에서 자연과 만나는 순간을 디자인했습니다.

 

그의 대표적 철학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입니다. 그는 인공과 자연이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스며드는 관계로 존재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의 방향, 바람이 통과하는 벽의 틈, 비가 고이는 물의 반사 등 작은 자연의 움직임을 건축의 일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또한 “돌은 시간을 품고, 물은 생명을 비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건축에서는 거친 돌벽, 고요한 수면, 절제된 빛이 하나의 리듬을 이루며 공간 전체를 감싸줍니다. 이처럼 물·돌·빛의 조화는 그의 건축 언어의 핵심이었습니다.

 

이타미 준의 건축은 사람의 움직임과 감정의 흐름을 세심히 고려합니다. 복잡한 구조 대신 단순한 선과 질감으로 구성되지만, 그 속에는 깊은 여운이 남습니다. 그래서 그의 건축을 경험한 사람들은 “공간이 아니라 시(詩) 속에 들어간 느낌”이라고 표현하곤 합니다.

 

이타미 준이 설계한 제주도 방주교회 전경
이타미 준 - 방주교회

대표 작품 – 제주에서 피어난 건축적 시(詩)

 

이타미 준의 대표작들은 제주도를 중심으로 펼쳐진 ‘자연의 건축 시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건축이 땅과 호흡하고 바람과 대화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 결과 탄생한 여러 작품은 각각의 자연 요소를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1. 수(水)의 미술관 – 빛과 고요가 머무는 공간

 

‘수(水)의 미술관’은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구조로, 천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수면에 반사되어 내부 벽면을 부드럽게 비춥니다. 방문자는 물결의 움직임에 따라 공간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물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건축의 본질적 재료로 작용합니다. 이 공간은 물의 투명성과 빛의 시간성을 동시에 담아내며, 건축이 어떻게 자연의 일부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2. 바람(風)의 미술관 – 공기의 흐름이 만든 공간 음악

 

‘바람의 미술관’은 제주도의 강한 바람을 공간 구성의 핵심 요소로 삼았습니다. 벽과 천장에는 의도적인 틈이 만들어져 바람이 실내를 통과하며 소리와 온도, 냄새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방문자는 바람이 스치는 감각을 통해 자연과의 소통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게 하는 건축’이라는 그의 철학을 상징합니다.

 

3. 돌(石)의 미술관 – 대지와 하나 되는 건축의 본질

 

‘돌의 미술관’은 제주 현무암을 주요 재료로 사용해, 인공적 건축과 자연 지형의 경계를 거의 없앴습니다. 벽과 바닥, 천정이 같은 물질로 이어져 있으며, 마치 건축이 땅속에서 솟아난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가 말한 “돌은 시간을 담는다”라는 문장이 이 공간에서 완벽히 실현됩니다.

 

4. 포도호텔 – 흙과 인간의 따뜻한 연결

 

제주 중문에 있는 ‘포도호텔’은 그의 대표적인 숙박 건축으로, 자연 속 휴식의 철학을 구현한 공간입니다. 포도송이를 닮은 곡선 형태와 흙벽 마감은 건축을 자연의 일부처럼 느끼게 합니다. 내부 공간은 모든 객실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도록 설계되어, 각기 다른 풍경과 빛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감각을 존중한 배려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5. 방주교회 – 신앙과 자연이 만나는 경계의 공간

 

‘방주교회’는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구조를 통해 ‘신앙의 순수함과 자연의 조화’를 상징합니다. 교회 내부는 단순한 형태지만,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며 영적 울림을 만들어냅니다. 이 작품은 종교적 공간이 자연과 하나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6. 핀크스 스파 – 감각의 확장을 위한 건축 실험

 

‘핀크스 스파’는 물, 증기, 빛의 변화를 통해 감각의 회복을 의도한 공간입니다. 콘크리트와 유리, 물이 결합된 단순한 구조지만, 빛의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인체가 공간과 자연을 동시에 체험하도록 설계된 이 스파는 그의 건축 철학이 일상에서 구현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타미 준의 작품들은 각각 독립적인 의미를 가지면서도, 하나의 주제인 **‘자연과 인간의 감성적 관계’**라는 큰 틀로 연결됩니다. 제주도에서 그는 건축가이자 시인으로, 자연의 언어를 건축으로 번역했습니다.

 

 

예술과 건축의 경계에서 – 다방면의 예술가로서의 이타미 준

 

이타미 준은 건축뿐 아니라 회화, 조각, 서예, 디자인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도 활동했습니다. 그는 건축을 “예술의 종합체”라 보았고, 한 장르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의 드로잉과 회화는 건축 도면이라기보다 시각적 시(詩)에 가깝습니다. 직선보다는 곡선, 색채보다는 질감, 구조보다는 감정이 중심에 있습니다. 그는 재료를 다루는 감각이 뛰어나 콘크리트조차 따뜻한 물질로 느껴지게 했습니다.

 

2004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화훈장 슈발리에(Chevalier des Arts et des Lettres)’를 수훈했고, 2010년에는 일본에서 ‘건축학회상 작품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러한 국제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나는 제주에서 가장 많은 영감을 받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건축은 단순한 공간의 구축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었습니다.

 

이타미 준의 건축이 남긴 유산

 

이타미 준은 생애 내내 자연, 인간, 예술의 경계를 허물며 살아갔습니다. 그의 건축은 크고 화려하지 않지만, 깊은 감성을 자극합니다. 제주도의 미술관 3부작, 포도호텔, 방주교회 등은 그가 추구한 ‘건축의 본질’을 가장 순수하게 보여주는 예이며, 지금도 많은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줍니다.

 

그는 “건축은 바람처럼 머물러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머무름이 아닌 스며듦, 인공이 아닌 자연스러움, 기능이 아닌 감성. 이타미 준의 건축은 이러한 철학을 고요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건축이 기술과 자본에 의해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묵직한 울림을 전합니다. 인간이 자연과 다시 연결되어야 한다는 메시지, 그것이 바로 이타미 준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