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성과 구조의 미학을 탐구한 건축가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건축은 기술과 철학이 결합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투명성’과 ‘구조미’를 통해 공간의 본질을 탐구한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Dominique Perrault, 1953~)가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형태를 설계하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도시와 인간, 공간의 관계를 재정의한 철학적 건축가로 평가받습니다.
페로는 유리, 금속, 빛 같은 현대적 재료를 활용하여 건물의 경계를 흐리고,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했습니다. 그의 작업은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개방성과 도시의 흐름을 건축적으로 표현한 실험이었습니다.
특히 1990년대 프랑스 국립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과 2000년대 서울 이화여대 ECC(Ewha Campus Complex)는 그의 철학이 집약된 대표작으로, 전 세계 건축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도미니크 페로의 건축 철학과 주요 작품을 통해, 그가 현대 건축에 남긴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도미니크 페로의 건축세계 : 기술적 미니멀리즘 ( 형태보다 시스템을 설계하다)
도미니크 페로의 건축 세계는 ‘기술적 미니멀리즘(Technical Minimalism)’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장식적 요소를 최소화하고, 구조 자체의 논리와 질서를 통해 미를 창조했습니다.
그의 철학은 “건축은 형태가 아니라 시스템이다(Architecture is not form, it is system)”라는 신념으로 요약됩니다. 즉, 건축은 조형의 결과가 아니라 공간을 구성하는 과정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페로는 산업적 재료인 금속 메시(mesh), 반투명 유리, 알루미늄 패널을 사용하여 건축물의 물성을 드러내고, 이를 도시의 풍경과 결합시켰습니다. 이는 하이테크 건축(High-tech architecture)의 기술적 정밀성과 미니멀리즘의 절제미를 융합한 접근이었습니다.
그의 작업은 르코르뷔지에의 합리주의적 전통과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미학적 단순성을 계승하면서도, 그 이상으로 “빛, 재료, 구조가 만들어내는 투명한 공간의 언어”를 구축했습니다. 이러한 미학은 이후 디지털 시대의 건축이 나아가야 할 방향, 즉 공간의 개방성과 정보의 흐름이 결합된 건축 시스템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도미니크 페로의 대표작 – 프랑스 국립도서관과 이화여대 ECC, 빛과 지하의 건축
도미니크 페로의 철학은 그의 대표작 두 곳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는 ‘빛의 건축’으로 불리는 프랑스 국립도서관(BnF, 1995), 또 하나는 ‘지하의 도시’를 구현한 이화여대 ECC(2008)입니다.
이 두 작품은 각각 하늘과 땅, 개방과 매몰이라는 상반된 개념을 통해 공간의 경계를 새롭게 정의했습니다.
- 프랑스 국립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BnF는 파리 13구 세느강변에 위치하며, 네 개의 L자형 타워가 마주 보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각 타워는 마치 쌓아 올린 책의 모서리를 닮아 **‘지식의 탑’**을 상징합니다.
페로는 건물 중심부를 넓게 비워 중정(courtyard)을 조성하고, 그 안에 녹지 정원을 배치했습니다.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내부에서는 시선이 닿는 이 공간은, 닫혀 있으면서도 열린 공간이라는 역설적 감각을 전달합니다.
외벽에는 반투명 유리(fritted glass)를 사용해 도시 풍경을 반사시키며, 내부로 부드러운 자연광을 들여옵니다. 그 결과 도서관은 지식의 수장고이자,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사색의 공간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로 페로는 1997년 미스 반 데어 로에 유럽건축상(Mies van der Rohe Award)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건축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 이화여자대학교 ECC(Ewha Campus Complex)
이화여대 ECC는 도미니크 페로가 아시아에서 남긴 가장 상징적인 작품입니다. 서울의 경사진 지형을 그대로 활용해, 언덕을 건물의 지붕으로 전환하는 독창적인 설계를 선보였습니다.
외부에서 보면 단순한 녹지 경사로 같지만, 그 아래에는 강의실, 공연장, 카페, 도서관, 영화관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거대한 복합공간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지하의 도시(Urban Underground)”라 부르며, 기존의 폐쇄적 지하공간을 빛과 공기가 순환하는 개방적 공공영역으로 바꾸었습니다.
ECC의 중심 통로는 두 개의 유리 파사드 사이로 자연광이 깊숙이 들어오며, 사람들은 계곡처럼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이동합니다.
이 동선은 도시의 흐름과 인간의 보행 리듬을 건축적으로 연결하는 장치입니다. ECC는 2008년 세계건축상(WAF Award)을 비롯해 여러 국제상을 수상하며, 페로가 ‘빛의 건축’에서 ‘지하의 건축’으로 확장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도시와 건축의 경계를 허무는 디자인
도미니크 페로는 개별 건물보다 도시 전체를 하나의 유기적 구조로 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건축은 단절된 오브제가 아니라, 도시의 리듬과 연결된 흐름 속에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마드리드의 카하 마히카(Caja Mágica, 2009)는 세 개의 경기장을 하나의 거대한 구조 안에 통합하고, 각 경기장의 지붕이 개폐되며 서로 다른 기능으로 전환됩니다. 이러한 설계는 도시의 움직임을 건축 안으로 끌어들여, ‘변형 가능한 건축’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지하공간의 공공성에도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제네바 레만 익스프레스(Leman Express, 2020) 프로젝트에서는,
지하철역을 단순한 교통 시설이 아니라 도시를 연결하는 공공적 플랫폼으로 설계했습니다. 빛, 소리, 시선이 교차하는 공간 속에서 페로는 지하의 건축을 새로운 도시의 층(layer)으로 확장시켰습니다.
도미니크 페로가 현대 건축에 남긴 영향과 평가
도미니크 페로는 하이테크 건축의 정밀함과 미니멀리즘의 단순미를 결합해,“투명성과 공공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건축언어를 구축했습니다.
그의 철학은 노먼 포스터, 렌조 피아노, 장 누벨 등 동시대 건축가들의 공공건축 설계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빛과 금속의 조합을 통해 인간적인 감성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됩니다. 비평가들은 그를 “빛과 메탈의 시인”이라 부르며, 그의 건축이 기술과 감성의 균형 위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는 최근 “도시 회복탄력성(Urban Resilience)” 개념을 강조하며, 지속 가능한 도시 인프라와 공공공간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건축은 더 이상 물리적 건물이 아니라, 인간과 도시를 잇는 사회적 시스템입니다.
빛과 땅으로 도시를 설계한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는 건축의 외형을 넘어서, 도시의 질서와 사회적 흐름을 설계한 건축가입니다. 그의 건축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질서’를 드러내며, 빛, 금속, 지하, 자연이라는 상반된 요소를 하나의 구조로 엮어냅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는 빛을 통해 개방성을, 이화여대 ECC에서는 지하를 통해 확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두 축은 그가 말하는 현대 건축의 본질, 즉 “경계의 해체”를 상징합니다.
그의 작업은 오늘날에도 묻습니다. “건축은 어디서 끝나고, 도시는 어디서 시작되는가?”도미니크 페로의 답은 분명합니다. “건축은 도시의 일부이며, 도시는 인간의 연장이다.”
이 철학은 디지털 시대의 건축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며, 공간을 단순히 짓는 행위가 아닌, 사회를 설계하는 행위임을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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