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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건축가 시리즈14. 하이테크 건축의 선구자, 리처드 로저스의 건축 철학과 대표작

by kkhin5124 2025. 10. 5.

현대 건축을 바꾼 혁신가, 리처드 로저스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 초반까지, 건축계는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실험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영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 1933–2021)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이테크 건축(High-Tech Architecture)’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선도하며, 건축을 단순히 외형적 아름다움이 아닌 도시와 사회를 연결하는 공공적 장치로 바라보았습니다.

 

파리의 퐁피두 센터, 런던의 로이드 빌딩, 밀레니엄 돔 등 그의 작품들은 도시의 상징이자 시대정신을 드러내는 기념비적 건축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본 글에서는 리처드 로저스의 건축 철학, 대표작, 그리고 그가 남긴 유산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이테크 건축의 선구자, 리처드 로저스의 건축 철학과 대표작
리처드 로저스 - 로이드 빌딩

리처드 로저스의 생애와 건축 철학 

리처드 로저스는 1933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이후 런던 건축협회 건축학교(Architectural Association School of Architecture)와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수학하며 국제적 감각을 키웠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난독증을 앓아 학업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건축을 통해 독창적인 표현력을 발휘했습니다. 

 

그의 건축 철학은 투명성, 유연성, 공공성이라는 키워드로 요약됩니다. 건축물의 구조와 설비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내부 공간을 최대한 개방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또한 그는 도시를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로 보고, 건축이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습니다. 이는 훗날 그가 영국 상원의 귀족 작위(Lord Rogers of Riverside)를 수여받고, 공공정책 자문 활동에 참여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대표작과 건축적 특징 

리처드 로저스의 대표작으로 가장 잘 알려진 건물은 파리의 퐁피두 센터(1977)입니다. 렌조 피아노(Renzo Piano)와의 협업으로 완성된 이 건물은 미술관이자 도서관, 공공광장을 아우르는 복합 문화 시설입니다.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구조체와 설비를 외부로 드러낸 ‘안팎이 뒤집힌 건물’이라는 점입니다. 파란색 배관은 공기 순환, 초록색은 수도, 노란색은 전기, 빨간색은 이동 동선을 표시하여 누구나 직관적으로 건축의 기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시간이 지나며 파리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퐁비두 센터의 협업 건축가 렌조 피아노에 대해서 더 알아보기 

건축가 시리즈 5. 렌조 피아노: 현대 건축을 이끄는 빛과 투명성의 건축가

 

또 다른 대표작인 런던 로이드 빌딩(1986)은 보험회사 본사 건물로, 퐁피두 센터의 철학을 계승한 사례입니다. 모든 엘리베이터, 계단, 설비가 건물 외부에 배치되어 내부 공간은 탁 트인 유연한 오피스로 활용됩니다. 이 혁신적인 설계는 고층 빌딩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2011년 영국 정부로부터 법적 문화재(Grade I listed building)로 지정될 만큼 높은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이외에도 밀레니엄 돔(1999, 현 O2 아레나), 웨일스 국회의사당(2005),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 터미널 4(2005) 등은 공공성과 혁신성을 동시에 담은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특히 바라하스 공항은 자연 채광을 극대화하고, 리듬감 있는 지붕 곡선을 통해 여행자에게 쾌적한 공간 경험을 제공하여 스페인 건축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수상 경력과 사회적 역할 

리처드 로저스는 단순히 건축가에 머무르지 않고, 도시 정책과 사회적 가치에 깊은 관심을 가진 실천가였습니다. 그는 2007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을 수상하였으며, 영국 왕립건축가협회(RIBA) 금메달, 스털링상,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등 수많은 국제적 상을 받았습니다. 

 

또한 영국 정부의 도시 재생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하여 런던의 공공 공간 확충, 보행자 친화 도시 설계, 지속 가능한 건축 정책 제안 등에 기여했습니다. 그는 “좋은 건축은 민주주의의 표현”이라는 신념을 강조하며, 건축이 단순한 상업적 도구가 아니라 시민의 권리와 직결된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이러한 사회적 활동은 건축을 넘어 정치와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었고, ‘건축가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화두를 다시금 건축계에 던졌습니다. 

 

리처드 로저스의 건축이 남긴 유산 

리처드 로저스가 남긴 건축적 유산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이테크 건축의 정립입니다. 기술적 요소를 과감히 드러내는 디자인은 이후 수많은 건축가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둘째, 도시와 공공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입니다. 그는 건축이 개인의 사유물이 아닌 사회적 자산임을 강조했습니다. 셋째, 환경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선구적 접근입니다. 자연 채광, 환기, 유연한 공간 활용 등은 오늘날 친환경 건축의 기본 원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리처드 로저스는 2021년 12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건축과 사상은 여전히 세계 여러 도시에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퐁피두 센터 앞 광장에서 모여드는 사람들, 로이드 빌딩에서 일하는 직장인들, 바라하스 공항을 오가는 여행객들 모두 그의 건축이 실현한 ‘열린 공간’의 가치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열린 건축의 시대를 연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는 건축의 본질을 기술적 실험이나 외형적 미학에만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건축을 사회적 도구로 바라보며, 공공성과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장치로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시대의 철학을 담은 공간이자, 사람들의 삶을 연결하는 매개체였습니다. 

 

오늘날 도시와 사회가 직면한 기후 위기, 공동체 붕괴, 불평등 문제 속에서 리처드 로저스의 건축 철학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건축은 사회를 반영하고, 더 나은 미래를 제안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로저스가 남긴 하이테크 건축의 유산은 ‘열린 공간, 열린 사회’를 향한 길을 밝혀주는 등불로 기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