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동양건축사 10. 창은 풍경을 담는 액자 – 한국 전통 건축의 창

kkhin5124 2025. 9. 19. 09:02

공간을 여는 장치에서 풍경을 보는 프레임으로

 

건축에서 창문은 흔히 빛과 바람을 들이는 기능적 요소로 인식됩니다. 그러나 한국전통건축에서 창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자연을 끌어들이는 장치이자, 풍경을 담아내는 액자였습니다. 창은 단순히 시야를 열어주는 도구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내면을 연결하고, 공간과 감정을 정제하는 건축적 매개체였습니다.

 

한옥의 창은 언제나 주변 자연을 삶 속으로 초대했습니다. 창을 열면 시선은 마당과 정원, 멀리 산세로 이어졌고, 닫으면 은은히 스며드는 빛과 바람이 실내를 감쌌습니다. 창을 통해 사람들은 사계절의 변화를 감상하고, 삶의 리듬을 자연의 흐름과 조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한국 건축에서 창문이 어떤 방식으로 자연, 감성, 공간의 미학을 담아냈는지, 그리고 그 전통이 현대 건축에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건축
한국전통건축의 창

한옥의 창 – 자연과의 대화

 

한국전통건축의 창은 단순히 개구부가 아니라 자연과 건축이 대화하는 경계였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격자무늬의 창호와 툇마루와 연결된 공간입니다. 격자와 창호지는 풍경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은은히 걸러내어, 마치 수묵화 같은 풍경을 내부로 끌어들였습니다.

 

한옥의 창은 배치와 방향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랑채의 창은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답게 탁 트인 조망을 제공했고, 안채의 창은 사적이고 은밀한 풍경을 담아냈습니다. 대청마루에 난 넓은 창은 바람길을 확보하는 동시에 앞마당과 정원을 액자처럼 보여주었고, 작은 방의 창은 제한된 시야 속에서 집중된 풍경을 강조했습니다.

 

이처럼 창은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자연을 어떻게 바라볼지 설계한 건축가의 의도를 드러내는 장치였습니다. 이는 “집은 땅에 순응하고, 창은 자연을 담는다”는 한국 건축의 철학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창과 풍경 – 차경(借景)의 미학

 

한국 건축에서 창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개념은 차경(借景, 경치를 빌려온다)입니다. 이는 바깥 경관을 내부 공간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건축 기법으로, 창을 통해 자연을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감상하는 방식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창덕궁 후원의 정자를 들 수 있습니다. 정자 내부에 앉아 창을 바라보면 연못과 숲, 멀리 보이는 산세가 한 폭의 산수화처럼 프레임 안에 담깁니다. 이는 건물 자체보다 창을 통해 드러나는 풍경이 건축 경험의 중심이 되는 전통적 미학을 보여줍니다.

 

사대부 가옥에서도 마당에 심은 소나무, 연못의 연꽃, 담장 너머의 대나무 숲이 창을 통해 풍경화로 완성되었습니다. 이렇게 창은 일상의 공간을 자연과 연결하고, 인간의 감각과 정서를 풍경 속에 녹여내는 매개체로 기능했습니다.

 

창과 빛 – 시간의 흐름을 담는 액자

 

창은 빛을 받아들이는 통로이자, 시간을 기록하는 장치였습니다. 한옥의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아침, 정오, 저녁마다 다른 그림자를 드리우며, 공간의 분위기를 끊임없이 변화시켰습니다.

 

예컨대 아침의 부드러운 빛은 창호지를 통과하며 따뜻하게 번졌고, 한낮의 강렬한 햇살은 격자의 그림자를 바닥에 새겼습니다. 해 질 녘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은 방 안을 황금빛으로 물들였습니다. 이러한 빛의 연출은 건축적 장식이 아니라, 창이라는 장치가 만들어내는 생활 속 예술이었습니다.

 

빛과 그림자의 변화는 단순한 시각적 경험을 넘어, 시간을 체감하게 했습니다. 창은 계절의 이동과 날씨의 변화를 감각적으로 드러내며, 건축과 삶의 호흡을 맞추는 자연의 시계 역할을 했습니다.

 

창과 감정 – 시선의 프레임, 마음의 프레임

 

창은 보는 사람의 감정을 정리하는 프레임이기도 했습니다. 낮게 난 창은 앉은 자세에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머물게 했고, 위로 난 창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이처럼 창의 높이와 위치는 단순한 시각적 설계가 아니라, 사용자의 심리적 방향을 유도하는 장치였습니다.

 

또한 창호지의 질감과 격자는 풍경을 은은히 가려내면서 여백을 만들었습니다. 직접적인 노출 대신 여백 속에 풍경을 배치하는 방식은 상상력을 자극했고, 이는 동양 미학에서 중시하는 ‘비움의 미학’과 맞닿아 있습니다.

 

창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은 때로는 사색을 이끌고, 때로는 추억을 환기했습니다. 바람이 창을 흔드는 소리, 빗방울이 창호지를 두드리는 울림은 일상에서 자연과 교감하게 했습니다. 따라서 창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감정을 움직이고 내면을 여는 문이었습니다.

 

현대 건축에서의 창 – 전통의 계승과 변주

 

현대 건축에서도 한국 전통의 창 철학은 다양한 방식으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대형 유리창이나 파노라마 뷰 창은 자연을 내부로 끌어들이는 전통적 발상을 현대적으로 확장한 사례입니다.

 

예를 들어, 국내 건축가 승효상의 주택 설계에서는 큰 창을 통해 마당과 정원을 한 폭의 그림처럼 보여주며, 이는 전통 한옥의 차경 개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박물관이나 전시장 같은 공공건축에서는 창을 통해 자연광을 조절하고, 관람자의 시선을 유도하는 장치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뮤지엄 산’도 좋은 비교 사례입니다. 전시관 내부 창은 단순히 빛을 받아들이는 기능을 넘어서, 관람자에게 자연 풍경을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체험하게 만듭니다. 이는 한국 전통 창의 철학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결국 현대 건축의 창은 기술적 발전과 미학적 실험이 더해져 더욱 다양하게 표현되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연을 담아내고 삶과 연결하는 전통적 개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창문은 공간을 넘어 풍경을 디자인한다

 

한국전통건축에서 창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연과의 관계를 설계하고, 시간과 감정을 담아내며, 공간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도구였습니다. 창 하나로 공간의 쓰임, 감정의 흐름, 시선의 리듬이 결정되었고, 이는 곧 건축의 중심 철학이었습니다.

 

현대 건축에서도 창은 여전히 중요한 디자인 요소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창을 통해 자연을 바라보고, 그 속에서 삶을 해석합니다. 창을 설계한다는 것은 단순히 구멍을 내는 일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 감정과 공간을 연결하는 철학적 행위입니다.

 

따라서 창은 공간을 넘어서 풍경을 디자인하고 감정을 건축하는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건축의 창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과 자연을 잇는 가장 정교한 매개체이며, 우리의 삶을 예술로 확장하는 건축적 언어입니다.